●타카오군의 생활 번외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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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蟹님
1 : 타카오군의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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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이 생긴 것이야."
신쨩이 그렇게 말한 건, 오랜만에 서로 아무 일정도 없는 주말이 시작되기 직전인 금요일 밤이었다. 맛은 좋지만 좁고 더러운, 가격은 그럭저럭인 선술집 자리에 앉아 첫 술이 나온 직후였다. 가게 메뉴표가 붙은 벽을 따라 작은 다다미방을 추레한 칸막이로 좁게 나눈 자리에 신쨩이 불편한 듯 앉아 있어, 테이블을 약간 내 쪽으로 끌어당겨 자리를 넓혀 주었다. 그만큼 좁고, 가게 전체가 에어컨이 망가진 것처럼 찌는 듯 덥고, 하지만 일단 움직이고는 있는지 곰팡이 냄새가 나는 바람이 가끔 불어오고, 등 뒤 칸막이 너머 아저씨의 음담패설이 심하지만, 그럼에도 신쨩이 있는 여기가 나의 엘도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맥주잔을 들어 올렸을 때, 신쨩은 폭탄을 떨어뜨렸다. 내 마음에. 가차 없이.
"어…."
"연인이 생긴 것이야."
"아… 그래. 축하해. 음, 같은 직장 사람?"
"그래. 작업치료사다."
카운터 안쪽 TV에서 흘러나오는 나이트 게임 중계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이 볼을 크게 쳤다. 주인아저씨가 부엌칼을 든 오른손을 꾸욱 움켜쥐었다. TV 너머 관객과 내 뒷자리의 음담패설 아저씨가 동시에 환성을 올렸다. 펜스를 넘는 볼, THE·만루 홈런. 미안한데 좀 조용히 해 줘. 요미우리를 싫어하진 않지만, 지금은 전 세계가 나의 적이다. 작업 치료사가 뭐였지? 빗치의 일본어? 아닌가. 아무튼 멸망해라. 멸망해 줘, 제발. 아직 술은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는데, 어째선지 시야가 조금 붉어졌다. 그렇지만 여기서 제대로 웃는 것이 내 위대함입니다. 신쨩의 절친 타카오 군은, 이런 때도 확실히 웃을 수 있습니다. 빌어먹을. 이성 따윈 엿 먹어라.
"그래, 음… 축하해. 아― 응. 그렇구나. 축하해! 뭐야~신쨩, 꽤 하잖아! 언제부터?"
"한 달 정도 전이다."
"흐음, 한 달."
한쪽 무릎을 세우고, 우선 들어 올린 맥주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한 달 전에 난 뭘 하고 있었지? 일하고 있었다. 미팅도 갔고, 섹스도 했다. 의사의 끈질긴 부탁으로 타 병원 담당인 신입 직원과의 만남도 주선했다. 그런데 뭐야. 딱히 나쁜 짓은 하지 않았다. 뭐에요 신님.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이런 갑작스러운 전개라니. 어째서, 오랜만에 만난 신쨩과 즐겁게 술을 마시고 즐겁게 수다를 떨며 일의 피로를 전부 날려버릴 만한 멋진 주말을 보내자고 두근두근했던 나에게, 이런 심한 말을 들려주는 거야? 요미우리, 시끄러워. 추가점이나 따고 있을 때가 아니야. 오늘 밤은 그럴 때가 아니야. 베이스타스. 힘 내. 나 지금 너희들의 심정을 꽤 리얼하게 알 것 같아.
신쨩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야 뭐 100% 모르겠지만, 진지한 얼굴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길 이 미남 자식. 입만 다물면 너 정말 멋있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타카오."
"뭐?"
"일은 안정적이다. 시간을 비울 수 없었던 건 연인이 생긴 탓이고, 나도 일만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아―…그렇구나―…그건 다행이네."
그야, 물어보긴 했었지만. 왠지 요즘 시간이 전혀 안 비는 것 같아. 신쨩 몸 괜찮아? 잘 쉬고 있어? 레지던트의 과로사 따윈 뉴스거리도 안 되거든? 밥은 잘 먹고 있어? 만들어 줄까? 뭐야. 난 무슨 피에로야? 작업치료사 연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함께 밥을 먹고 섹스하시느라 바빴던 겁니까? 그러시군요. 게다가 그걸 나에게 솔직하게 알려 주시는군요. 그야 절친이니까, 알려 주시는군요. 고마워. 뭐 그렇게 생각하면 기뻐. 젠장 신쨩 녀석, 날 따르고 있잖아.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건배하자, 신쨩."
"뭐?"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신쨩의 연인을 위해."
그리고 내 실연에. 덧붙여서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은 신쨩에게 붙는 수식어이며, 그의 연인에게 붙는 게 아니다. 신쨩은 조금 얼굴을 붉히며 눈을 피한 뒤, 바보 녀석이라 내뱉고는 잔을 들어 올렸다. 알코올이 적은 매실주 사워. 내가 도수를 조금 낮춰준 매실주 사워. 뭐야 너 정말, 연인이 생겼다고 하면 내가 안심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닌데. 뭐 상관없지만. 과로사하는 것보다는 연인이 생긴 게 분명 훨씬 낫다. 네가 바빠서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해서 날 잊고 있는 거라면, 그 편이 훨씬 낫다. 정말인가. 눈물이 나왔다.
"건배! 제길! 행복해라!"
"… 큰 소릴 내지 마."
맥주잔을 글라스에 챙 부딪쳤다. 맥주 거품이 튀었다. 신쨩은 얼굴을 찌푸리고선, 살짝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좋아 그 얼굴. 네 그런 얼굴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기뻐.
카운터에 빽빽이 늘어선 샐러리맨의 등 뒤로 보이는 TV 화면 너머에서는, 요미우리 타선이 대폭발하고 있었다. 베이스타스. 오늘 너희는 내 마음의 친구야. 인생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어떻게 만나게 됐어?"
"…얘기할 만한 것도 없다."
카츠오노 타타키(カツオのたたき)는 전에 먹었을 때처럼 고소하고 맛있었다. 맥주가 당긴다. 양반다리를 한 채 턱을 괴고서, 벌써 맥주는 세 잔 째. 페이스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날도 있다. 오늘 안 마시면 도대체 언제 마시겠어. 신쨩의 매실주 사워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네가 걱정하지 않아도 그거, 감주보다도 도수 낮아. 거기 샐러리맨, 노래는 그만 해. 요미우리는 싫지 않지만, 오늘 내 마음의 친구는 베이스타스다.
"동료에게 소개받아서 식사를 했고, 앞으로도 둘이서 만나 달라고 하더군."
"그래서?"
"사귀기로 했다."
"가벼워! 뭐야 그거 가볍잖아!? 신쨩 그렇게 쉽게 결정해도 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도 좋다고 하더군."
"신쨩, 가벼운 마음으로 애인 만들 수 있는 거였어?"
"할 수 있어."
"정말? 그렇구나! 어른이 됐네 신쨩! 좋아 좋아, 그런 거. 나 응원할게! 아저씨! 생맥주 하나 더!"
"타카오, 너무 과음하는 게 아닌가."
"괜찮아 괜찮아, 완전 괜찮아! 이건 마취니까!"
"마취?"
"그래! 술에 취하면 아픈 게 안 느껴지잖아?"
"어딘가 아픈 건가? 그럼 술 따윌 마실 때가 아닌 것이야."
"아하하 신쨩, 신쨩 신쨩, 괜찮아. 나 오늘은 마실 거야!"
가벼운 마음으로 너와 사귄다니, 뭐하시는 분이야? 그 작업 치료사. 역시 작업 치료사는 멸망해야 해, 신쨩. 내가 얼마나 무거운 마음으로 너와 친구를 하고 있는지 알아? 이제 곧 10년. 가볍지 않아. 그저 무겁다. 이제 내던지고 싶을 만큼 무거워. 아아, 그렇게 걱정스러운 얼굴은 하지 말아 줘. 나는 건강해. 몸은 건강. 마음은 빈사. 하지만 괜찮아. 맥주 마시면 나을 거야. 술은 백약지장. 틀림없다.
2층에서는 소개팅을 하고 있는지, 가끔 천장에서 1층과는 다른 종류의 환성이 울렸다. 이런 추레한 가게 2층에서 미팅이라니, 제정신인가. 음식은 맛있지만. 그렇지만 뭐,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까. 취향은 제각각이다. 이렇게 부드러운 곳은 단 하나도 없을법한 괴짜여도, 먹으려는 사람이 있다. 좋아 좋아. 먹어봐. 이 녀석은 꽤 달콤하거든. 익숙해지면 사랑스럽고, 빠지면 깊다. 수렁이다. 여자는 좋아한다는 수렁의 끝에는 결혼이라는 골이 있다. 나도 어떤 의미로는 이것이 골인가. 최고의 친구. 여기가, 우리들의 골인가. 좋아 좋아, 맥주 마시자.
"아~더워. 이모, 이거 에어컨 나오고 있어요?"
"절전 중이야."
"그게 뭐야, 지구보다 나한테 상냥하게 해 줘요~18℃로 해 줘요!"
"셔츠에 얼음 넣어 줄까?"
"하하! 뭐에요 그게~기분 좋을 것 같은데요?"
"자, 부채. 알아서 부쳐."
"쇼와시대도 아니고!"
팔 굵은 아주머니가 데친 아스파라거스와 소금, 마요네즈가 담긴 파란 접시를 테이블 위에 쿵 내려두고, 허리에 감은 앞치마 끈에 끼워져 있던 콘택트렌즈 가게의 광고가 들어간 부채를 내던졌다. 한 손으로 받아 부쳐 보자, 후덥지근한 바람이라도 그 나름대로 시원하다. 내친김에 신쨩에게도 부쳐줬다. 신쨩은 바람에 눈을 가늘게 떴다.
"자, 아스파라거스 왔어. 먹어. 신쨩 이거 좋아하지."
"그래."
"합숙 때도 아스파라거스 먹었는데. 인근 농가 아저씨가 준 거, 기억나? 그것도 맛있었지."
"맛있었군."
"하― 이제 추억은 예쁠 뿐이라 지긋지긋해."
"타카오?"
"응―? 아, 모기! 저기 이모! 베이프 좀 피워줘요!"
"피우고 있어! 동그란 모기향!"
"정말 쇼와시대냐고요! 뭐야, 그러고 보니 이거 담배 냄새가 아니었잖아! 여기 항상 매캐해서 몰랐어요!"
"너 내쫓는다."
"몇 번이라도 올 거에요 이모! 여기 맛있으니까요!"
아주머니는 히죽 웃었다. 사랑스러운 아줌마. 나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행복해지고 싶어. 안 될까요? 아저씨의 부엌칼이 빛난다.
"타카오, 왜 그렇게 신나서 까부는 거냐."
신쨩이 부채 바람을 받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본 채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 신나서 까부는 것처럼 보일까. 그렇다면 제대로 웃어야 한다. 베이스타스 너희들도, 패배 시합 후에도 카메라 앞에서는 그 나름대로 웃어 보이니까.
"그렇지만, 좋은 날이잖아. 신쨩에게 여자친구가 생겨서."
"…그렇군."
신쨩은 그렇게 말하고,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이걸로 좋았던 것이다."
"응?"
"아무것도 아니다."
아게다시 도후(揚げだし豆腐)와 가지 니비타시(煮びたし), 야키토리(焼き鳥). 누추한 가게지만, 음식은 맛있다. 에어컨은 언제나 망가진 것처럼 덥고 춥지만, 인심 좋은 곳이다. 좁고 손님들의 저질스러운 이야기도 심하지만, 세련되고 조용한 가게보다 마음껏 술에 취할 수 있다. 신쨩 외의 사람과 올 일은 거의 없다. 신쨩에게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적당히 취하게 해서, 조금은 술주정을 하며 제멋대로 굴었으면 할 때 데려 온다. 그렇게 지친 신쨩을 받아들여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주는 건 내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이런 나날도 차츰 아름다울 뿐인 추억이 될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싸구려 기념품이 뒤죽박죽 놓인 좁은 카운터 안쪽에서는 언제나 전화가 울리고, 아주머니는 땀을 흘리며 바쁘게 일하고 있다. 주인아저씨는 프라이팬을 휘저으며 볶음밥을 만들고 있다. 못 만드는 게 없구나, 아저씨. 뭐든 맛있어. 몇 번이라도 오고 싶어. 하지만 앞으로 몇 번이나 올 수 있을까. 나에게 있어서 여기는 신쨩을 위한 가게니까, 신쨩이 없어지면 분명 괴로워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아,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맥주나 마시자.
나이트 게임은 요미우리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 뒤는 금요일 로드쇼, 터미네이터. 몇 번이나 봤는지. 이제 슬슬 대사를 외우게 됐다. 그런데도 시작하면 조금 보게 된다. 왜 미래의 지구는 대부분 사막일까. 수수께끼다. 미래가 오면 알게 될까?
"신쨩."
"뭐야."
"섹스했어?"
풉, 신쨩이 먹던 생강을 뱉어냈다. 물수건을 던져줬다. 나이스 슛. 알코올이 거의 없는 매실주 사워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이 새빨갛다. 나, 네 그런 점도 좋아해. 평상시 바보 같을 만큼 방약무인한 주제에, 이런 이야기에는 제대로 수줍어하는구나.
"뭐라고, 타카오…."
"아니, 안 했겠구나. 미안. 이상한 소리 해서. 아직 사귄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신쨩이 그렇게 비상식적인 짓을 할 리 없지."
"무슨…."
"사귀고 삼개월까지는 키스까지. 상식이잖아?"
"…그런 건가?"
"그래, 당연하잖아. 뭐야 신쨩, 설마 몰랐어?"
"…그럴 리 없는 것이야. 당연히 알고 있어!"
"그렇지? 앞으로 두 달간은 인내의 나날이구나, 힘 내 신쨩."
"인내라고 말할 일은 아니다."
"흐음."
설마 믿었나. 굉장해 신쨩. 신쨩의 그런 점을 정말 좋아하지만, 이상한 놈에게 걸리지 않게 조심해. 나는 괜찮지만.
아아, 신쨩과 가벼운 마음으로 만나는 작업치료사. 뭐 실제로는 평범하게 청초하고 좋은 사람일 것이다. 신쨩이 그렇게 가볍게라도 만나려고 하니까. 젠장, 이길 생각도 없지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절친으로서, 적어도 앞으로 잠시 동안만이라도 신쨩의 거시기는 보류해 줘. 어쩔 수 없다. 나는 심정적으로는 신쨩의 엄마이기도 하니까.
"계산이요!"
"소리 안 질러도 들려. 너 엄청 취했는데 걸을 수 있어?"
"그럼요 그럼요, 저 건강하거든요. 침대 위에서 특히 그래요~."
"그래그래, 6800엔이야."
"네엡. 맛있었어요. 또 올게요."
"그래."
신쨩과 정확히 3400엔씩 나눠, 동전을 핑크색 트레이 위에 떨어뜨렸다. 잘난 듯 말하지만 실은 다리가 꽤 휘청거리는 나는, 신쨩의 어깨를 빌렸다. 그런 날도 있다.
가게 문을 열자, 초인종이 딸랑딸랑 울림과 동시에 후덥지근한 여름밤의 바람이 훅 불어왔다. 찌는 듯 더웠던 가게 안도, 그 나름대로 에어컨을 틀어놨었다는 걸 느낀다. 참기 힘들어 넥타이를 풀었다. 와이셔츠는 등에 들러붙어 있다.
"더워― 신쨩!"
"네가 들러붙어 있어서 더 더운 것이야."
술에 거의 취하지 않은 신쨩은, 몸을 기대면 꼭 커다란 나무 같아 믿음직스럽다. 아아 정말로, 여자는 좋겠다. 이 녀석에게 기대어 평생을 보낼 수 있다. 나도 이렇게 반했는데. 할 수 있다면 평생 바싹 붙어있고 싶다는 덧없는 꿈. 적어도 지금은 물리적으로 기대겠어. 전력으로.
"무겁다."
"요즘 살쪘어. 역시 농구를 안 하니까 달라. 먹는 양은 줄었는데 살이 찌더라. 웃기지 않아?"
"그런 뜻이 아니다. 똑바로 네 발로 걸어!"
"무리야. 왠지 하늘이 빙빙 돌아, 신쨩. 오늘 자고 갈래. 혼자선 집에 못 가겠어."
"…그러니까 과음하지 말라고 한 것이야."
"마시고 싶었어. 엄청 마시고 싶었어, 오늘 밤은. 미안 신쨩. 나의 에이스님!"
신쨩을 올려다보며 실실 웃자, 신쨩은 찡그린 얼굴로 나를 노려다 봤다. 그 너머에는 별. 이런 엉망진창인 술주정꾼의 밤도, 언젠가 회상할 때에는 분명 아름다운 추억이 될 것이다. 신쨩은 나를 거의 질질 끌며 걷기 시작했다. 넓은 보폭. 늠름한 팔. 어째서 나는 남자 따위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어째서 이런 남자답고 멋진 신쨩에게, 내 최고의 에이스님에게, 박고 싶다고 생각하는 걸까. 수수께끼다. 미래가 와도 모를 영원한 수수께끼다.
"타카오."
"응."
나는 갈지자로 비틀거리며 걷는다. 갈지자가 뭐였더라. 한자? 우리말? 아마 한자였던가. 가로수가 여름밤의 바람에 천천히 흔들린다. 느슨하게 푼 와이셔츠의 옷깃 언저리로 바람이 불어왔다.
"이걸로 괜찮은 건가."
"괜찮아."
뭐야. 잘 모르겠어 신쨩. 나 잔뜩 취했구나. 신쨩의 높은 어깨에 걸친 왼팔은 솔직히 조금 아팠다. 그렇지만 술에 취한 나를 부축하기 위해서니까 어쩔 수 없다. 내 오른쪽 옆구리를 감싼 신쨩의 팔이 뜨거웠다. 그 뜨거움이 기분 좋다. 상냥하구나 신쨩, 주정뱅이인 나를 버리지 않다니. 이 신쨩의 상냥함은, 나와 신쨩의 우정의 역사다. 방약무인하고, 대화나 농담도, 거짓웃음마저도 통하지 않던, 마치 도깨비 같던 신쨩이, 지금은 이렇게 분명하게 나를 걱정하고 있다. 이건, 나와 신쨩의 우정의 역사구나. 그러니까 나는, 너와의 우정의 역사를, 절대로 부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하늘에는 별. 옆에는 신쨩. 나는 주정뱅이. 술기운에 좋아한다거나,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물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너와의 우정을 포기할 수 없어.
가로수가 흔들리고 있다. 내 발밑에 지면도 흔들리고 있다. 신쨩만이 흔들리지 않았다. 여름밤의 냄새가 난다. 습기 찬 풀과 배기가스와 상한 음식물 냄새. 이걸로 괜찮은 걸까? 이걸로 괜찮은 것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우정이라도, 그것이 언젠가 끝나버리는 것이라도, 네가 가끔 내 곁에 있어 준다면, 그걸로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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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사토군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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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압강하제 출시 5주년의 대대적인 강연회에서, 오랜만에 타카오를 만났다.
개최는 도쿄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신칸센의 일등석 티켓과 택시 티켓, 2박 3일의 호텔 예약표를 들고 의사들이 몰려든다. 그에 따라 당연히 MR도 몰려든다. 타카오가 올해 4월부터 본인 희망으로 시즈오카에 이동한 후, 메일을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실제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타카오는 수트에 명찰을 걸고, 근처에 있던 처음 보는 MR과 뭔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꽤 비싸 보이는 수트를 입고, 열 받게도 살 찔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덧붙여서 나는 올해 들어 또 2kg가 쪄서, 제대로 다니지도 않는 헬스장의 회원이 되었다.
타카오 카즈나리 29세. 여전히 여자에게 인기가 좋을 법한 모습을 하고선, 실은 호모니까 웃음이 나온다. 뒤에서 몰래 다가가 놀래키려고 하자, 감이 얼마나 좋은지 3미터 떨어진 곳에서 눈치채고는 뒤돌아 손을 들어, 이쪽도 손을 들어 답했다.
"타카오. 오랜만이야."
"오―, 오래간만이네! 사토, 너 또 살찐 거 아냐?"
"시끄러워! 만나자마자 남의 가슴을 후벼 파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며 내가 양손으로 배를 가리자, 타카오는 킥킥 웃었다. 이 녀석의 약삭빠른 성격은 가끔 정말로 밉다.
강연회가 시작된 지 30분. 로비에 있던 의사들은 대부분 이미 홀 안에 들어갔고, 지각생들이 드문드문 엔트란스와 카운터를 가로질러 갔다. 일반 강연은 칸사이의 대학 교수, 기념 강연은 해외에서 초빙한 제너럴리스트로, 동시통역이 들어간다. 이제 제품 소개가 막 끝난 직후로, 강연이 시작되려면 좀 더 시간이 있다.
타카오는 조금 전까지 대화하고 있던 상대에게 살짝 손을 들어 인사한 후, 사람이 적은 엘리베이터 뒤 자판기 쪽으로 손짓을 했다.
"방금 전에 시즈오카 쪽 사람이야?"
"아니, 여기서 처음 만난 사람. 옛날에 농구를 했었다길래 들떠버렸지 뭐야."
"흐음―. 꽤 있네. 농구 맨."
"그렇지. 윤대협을 동경해서 농구를 시작했대."
"슬램 덩크? 서태웅이 아니라?"
"그야 멋있잖아 윤대협. 참고로 나는 송태섭 파야."
"잘생긴 캐릭터가 아니고?"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알아~사토군."
타카오는 호모다. 그보다 바이다. 그보다, 제일 좋아하는 상대가 남자다.
호모라면 요즘엔 그렇게 드문 것도 아니니 좋을 대로 하면 되는데, 이것저것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다 위궤양까지 얻은 타카오는, 결국 나의 나이스 어시스트에 의해 잘 풀려 소원을 성취한 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러운 훌륭한 호모가 되어, 그 상대에게 찰싹 붙어 시즈오카까지 가 버렸다. 인간은 무섭다. 타카오의 송별회에서 울고 있던 여성진에게, 지금 이 타카오의 우쭐한 미소를 보여 주고 싶다.
타카오의 전근 이야기는 꽤나 갑작스러웠고, 더군다나 본인 희망이라고 하니까, 처음엔 당연히 주위에서 타카오를 향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처음뿐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그쪽에 가서…라는 말을 듣고 순간 텐션이 올라갔던 이들도, 거기서부터 노도처럼 이어진 끊임없는 애인 얘기에 단번에 질색했다. 완전히 몸서리쳤다. 이야기를 꺼내면 길어지고 귀찮아지니, 그 후 타카오의 전근 사유에 대해서는 적당히 흘려 넘기는 게 암묵적인 룰이 되었다. 그 때문인지, 사무직 여직원은 타카오의 전근 이유를 여자관계 문제로 인한 좌천이라고 믿고 있다. 내가 적당히 둘러댄 거짓말이 훌륭하게 퍼진 결과이다.
"그래서, 요즘 어때?"
"오, 듣고 싶어? 호모의 사랑 얘기가 듣고 싶은 거야?"
"아―…역시 됐어. 그것보다, 일 얘기를 하라고."
"너 관심도 없잖아! 그거야, 타사 제품에서 문제가 생긴 덕분에 우리 쪽에 고객이 계속 들어와서 웃음이 멈추질 않아. 그 덕에 바빠져서 매일 야근이지. 열 받아 죽겠어!"
"아~ 거시기 대신 열 받아 있는 거야?"
"그래! 사토군! 그보다 시즈오카는 정말 장난 아냐. 이쪽은 접대 자숙이란 게 완전히 유명무실이라 웃음만 나. 요즘 장어만 먹고 있어."
"어머, 정력이 넘치겠네."
"그래. 매일 불끈불끈해서 죽겠다니까. 출동시킬 틈도 없는데."
"흐음."
뭐라고 해야 할까. 행복해 보인다. 부럽다. 호모든 뭐든, 상대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한 개 산다. 냉방이 잘 돼 시원하기 때문에 핫 커피를 샀다. 타카오는 상품을 한 번 둘러보고 난 후 나와 같은 캔커피를 골랐다. 타카오는 예전부터 언제나 캔커피나 영양 드링크밖에 사지 않는 주제에, 언제나 고민하는 건지 뭔지, 상품을 한 번 둘러보는 버릇이 있다.
뚜껑을 열고 유리벽 앞 난간에 기대, 남들에게는 그다지 들려줄 수 없는 잡담을 계속했다.
"지금은 함께 살고 있는 거야?"
"아니. 내가 왔다 갔다 하고 있어. 우렁 각시같이."
"어, 각시야? 타카오가?"
"너 그런 섬세한 걸 막 물어보지 마! 밤엔 내가 남편이야!"
"으에엑 괜히 물어봤어…네 호모 포지션따윈 안 궁금해…."
"말해 두겠지만, 혹시 상상하면 후려칠 거니까! 그걸로 빼지 마!"
"안 해 멍청아!"
바보다 이 녀석.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 뭐 어떻게 됐겠지.
타카오의 연인은 내가 전에 담당하고 있던 의사로, 뭔가 여러 가지로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타카오와 아는 사이라고 들었을 때는, 타입이 너무나도 달라서 꽤나 놀랐었다. 타카오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눈치챘을 때는, 남자나 거래처 상대라는 것보다 제일 먼저, 타카오는 정말 얼굴 밝히는 놈이구나. 참 기가 막힐 만큼 얼굴만 밝히는 놈이구나 싶었다. 적당히 인기 있고 적당히 놀고 있던 타카오의 상대는, 언제나 조금 넋을 잃고 볼 만큼 예쁜 사람이 많았다. 그 예쁜 이들을 먹어치운 결과가 이 이 사람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뭔가 이젠 때려주고 싶다.
10년 이상의 짝사랑이었던 것 같다. 작은 병이다. 아마 평생 낫지 않을 것이다.
"뭐, 사이가 좋은 것 같아서 다행이야. 큐피드인 나로서는."
"아아…정말."
타카오는 난간에 턱을 괴고,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행복해."
"이제 그만해! 듣기 싫어! 나 지금 일할 때가 아니었어. 미팅 갈래! 넌 발기부전이나 돼라!"
"그 땐 비아그라 부탁해."
"레바치오라고 불러! 정량은 지키고! 그보다 너 대낮부터 그런 얼굴 하지 마!"
타카오는 깔깔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다. 일단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타카오는 캔커피를 단숨에 마신 후,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배가 전혀 나오지 않아 화가 난다.
"하지만, 정말이야."
"뭐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네 덕분이야. 지금 정말 행복해서, 너무 행복할 정도라서, 뭔가 잘못됐더라면 이런 건 전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나와."
"흐음."
"고마워, 사토."
"아니아니, 너의 그 뱀 같은 집념만 있으면 나 같은 게 없었어도 결과는 비슷했을 거야."
"멍청아, 나는 미도리마에 관해서는 굉장히 섬세하고 소심하거든."
"정말?"
"정말로."
뭐 확실히, 위궤양이 생길 정도다. 섬세하고 소심하고 우렁각시에 밤엔 남편인 타카오는, 그러고 보면 옛날보다 어딘지 모르게 침착해 보였다. 침착해 보인다고 할까, 안정되었다. 원래 불안정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전에는 없었던 무게 같은 것이 있다. 아아, 사람은 변하는구나.
"싸우지 말고."
"안 싸워. 하지만 만약에 싸우게 되면 널 부를게."
"뭐? 왜?"
"큐피드잖아. 끝까지 책임져."
"뭐야 그게―! 그것보다 내 아내나 좀 찾아줘! 귀엽고 상냥하고 요리 잘하고 뒤태가 예쁜 아내님!"
"그래 그래. 찾으면 택배로 보내줄게."
"미리 말하겠는데, 러브 돌 따위가 아니거든!"
"뭐든 좋잖아,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 있다면 말야! 확실히!"
그 때, 타카오의 가슴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타카오는 꺼내서 액정을 확인했다.
"아, 선배 도착했다."
"응? 시즈오카 쪽 선배야?"
"그래. 오후부터라고 했는데 빨리 왔네. 잠깐 찾아올게."
"그래―. 건강하게 지내."
"너도! 싸우면 중재 잘 부탁드립니다!"
"시즈오카까지는 안 갈 거야! 미도리마 선생님 끌고 도쿄까지 오면 수습해 줄게!"
"푸핫!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고, 타카오는 손을 흔들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다. 어쩐지 감개가 깊다.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다. 남자끼리는 이러니 저러니 해도 힘들겠지만,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귀찮은 미도리마 선생님과, 실은 그보다 한 술 더 떠 귀찮은 타카오. 확실히 나는, 좋은 일을 했다.
"뭐, 모처럼 내가 노력해 줬는데, 오래 가 줘야 해."
그러니까 뭐, 이러쿵저러쿵 해도, 너희들이 어긋날 때에는 내가 달려가서 중재해 줄게. 올라탄 배다. 몇 번이라도, 언제라도, 필요하면 불러 줘.
배드 엔딩 따위는 엿 먹어라. 때 맞게 나타난 중재인이자 월하빙인,나는 해피엔딩의 천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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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너와 함께라면 삼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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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화창한 초가을날의 일이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내 마음은 평온하다. 그렇게 화창한 청천에, 미도리마 신타로는 날벼락을 날렸다.
"질렸다."
"뭐?"
"질린 것이야. 네가 만드는 단팥죽은 항상 같은 맛이다."
"뭐어?"
녀석은 식탁 위에 주홍색 그릇을 내려놓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 것 치고는 그릇이 텅 비었잖아 이 자식아. 전부 먹었잖아, 너.
주홍색 밥그릇은 단팥죽 전용으로, 단팥죽의 까만색이 두드러져 보인다는 미적 관점에서 주홍색을 골랐다. 둘이서 정월날 하치만 신사에서 발견한 후 산 것이다. 하나에 580엔. 세트로 샀지만 유독 한쪽밖에 쓰이지 않는다. 그 안에 들어갈 내용물을 만드는 것은 오로지 나, 배에 집어넣는 것은 오로지 이 초록색이다. 그 초록이 말하기를, 질렸다고. 과연. 이 자식.
"항상 똑같은 맛이라고 하지만, 너 이 맛을 좋아하잖아."
"아무리 좋아해도 계속 먹으면 질린다는 것이야."
"푸핫! 설마 했는데 신쨩! 그거 단팥죽 자체에 질린 거 아냐?"
"나는 단팥죽에는 질리지 않아."
쓸데없이 멋있잖아 이 녀석. 그런 대사는 여자에게 말해라. 난 시루코에겐 질리지 않아. 시루코는 일단 죽인다.
"그보다, 말해 주겠는데, 단팥죽 맛의 바리에이션은 그렇게 많지 않아. 여름엔 경단 넣어서 시원하게 만들고, 가을엔 밤 조림 넣고, 정월엔 떡 넣어 줬잖아. 그 밖에 뭐가 있는데. 김치 넣어버린다?"
"네가 말한 것은 토핑이다. 나는 단팥죽 그 자체의 맛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거야말로 통조림 단팥에 소금 뿌린 게 전부니까, 바리에이션도 뭣도 없다고."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도리마는 발끈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태만이란 것이야. 팥을 직접 삶아 만들면, 맛이 다양해질 것이야."
"그야 그렇겠지만, 아마추어가 해 봤자 시간만 들고 실패 리스크는 커지잖아. 한 번 더 말할 테니까 잘 들어줘. 통조림 팥에 내가 적당히 소금으로 간 맞춰 만든 게, 제일 신쨩 취향인 거야. 난 알고 있어. 그러니까 솔직하게 잘 먹었어 언제나 맛있는 단팥죽 고마워 타카오 사랑해~하고 나에게 키스한 후 침대 가서 옷 벗고 기다리고 있어. 나도 이것만 씻고 나서 갈 테니까."
"죽어. 진지하게 들어라 타카오. 네가 만든 단팥죽이 맛이 없다는 게 아니다. 그저, 항상 같은 맛에 매너리즘을 느낀다는 거다. 변화를 즐기고 싶은 것이야. 너도 자주 말하고 있잖아."
침대 위에서 말야. 그리고 반드시 무시당한다. 모험을 해 보려고 해도 이 초록이 너무 커, 나 혼자서는 자세 하나 바꿀 수 없는 불친절한 설계. 어째서 이 녀석의 모험심은 식탁 위에서밖에 발휘되지 않는 걸까? 좀 더 다른 3대 욕구로 모험하고 싶어한다면, 나는 당장이라도 아마존을 마구 검색할 텐데.
"아 정말, 알겠어. 백보 양보해서, 신쨩이 제일 좋아하는 내 단팥죽 맛을 굳이 바꾼다고 하자. 어떤 맛이 좋아? 말해 주면 생각해 볼게. 좀 더 단 게 좋아? 짠 게 좋아? 팥 알갱이가 많은 게 좋다든가, 반대로 적은 편이 좋다든가, 뭔가 그런 구체적인 희망사항 같은 거 있어? 있으면, 그렇게 만들어 줄게."
내 기특한 의견에, 미도리마는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미각을 말로 표현하는 건 어려운 것이야."
"응, 즉 구체적인 불만은 없는 거네? 너무 달다거나 너무 짜다거나, 오늘 단팥죽에도 별 불만은 없지? 그럼 됐잖아. 제멋대로 굴지 말고 맛있게 먹으세요."
"되지 않았어. 질린 것이야."
"너, 그런 소리 하면 나 상처 받는다?"
"넌 내가 참는 걸 바라진 않겠지?"
"때와 경우에 따라 달라. 자, 이렇게 하자. 내가 만든 것 말고, 신쨩이 이거다! 싶은 단팥죽이 있다면, 나도 그것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할게. 그러니까 표본을 가져와 표본. 뭣하면 네가 만들어 봐, 표본."
"표본?"
"그래, 네 이상적인 단팥죽."
내가 그렇게 말하자, 미도리마는 손 안의 텅 빈 그릇을 가만히 응시했다.
뭐 무리다. 미도리마도 그런 게 정말로 있다면 일부러 나에게 부탁하지 않고 그것을 직접 사거나, 가게에 가거나 할 것이다. 실제로 옛날엔 캔 단팥죽을 이것저것 사서는 마셔가며 비교하고 있었던 주제에, 지금 이렇게 질렸다고 하면서도, 오늘날까지도 캔 단팥죽에 돌아가지 않고 내가 직접 만든 걸 계속 마시고 있으니까, 결국 내가 만든 것이 이상적인 단팥죽이다.
질렸다는 소리나 하다니, 이 자식. 순간 나에게 질려버렸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멎을 뻔했다. 반성해 너. 좀 잘생기고 키 크고 머리 좋고 농구 잘하고 재미있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럽다고 우쭐대지 마. 질린다니 너,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미도리마의 반성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나는 물렀다. 단팥죽과 비슷할 정도로 물렀다. 눈앞의 인사 바보를 완전히 얕잡아 보고,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다."
"응?"
"확실히 네 말대로다. 목표가 뚜렷한 편이, 너도 만들기 쉽겠지."
"응?"
"찾자, 타카오."
"뭘?"
정해져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주말 단팥죽 마라톤이 시작되었다. 거의 악몽이다.
우선 미도리마가 했던 일은, 그 다음 주말에 편의점과 슈퍼를 돌며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캔 단팥죽을 사 오는 것이었다.
나와 살게 된 후로 완전히 멀어졌던 캔 단팥죽이다. 이쪽으로서 이것은 자그만 모욕이다.
"네 입맛은 그렇게 쉬운 거야? 편의점에서 파는 수준의 입맛이야?"
"이런 건 대기업 연구원이 밤낮으로 혈안이 되어가며 만들어 낸 맛이니까, 얕잡아 볼 순 없다. 게다가 네 단팥죽도 따지고 보면 통조림이잖아."
"아니야 신쨩. 기성품과 널 위해서 퍼스널라이즈 한 맛은 전혀 달라."
"긴 말은 됐고, 우선 맛을 보자."
그렇게 말하고 신쨩은 우선 캔 하나를 가볍게 흔든 후 뚜껑을 열어, 어째서인지 두 개가 준비된, 주홍색이 아닌 평소 사용하는 조금 작은 밥그릇에 반씩 따랐다.
"뭐야 이거, 설마 나도 마시는 거야?"
"당연하지. 네가 나의 이상을 알고 싶다고 해서 하고 있는 거다. 마시지 않으면 어쩌려고?"
"아니, 전부 마실 필요는 없잖아! 네가 이거다! 하는 걸 찾고, 그걸 내가 마시면 되잖아!"
"이상의 탐구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시행착오 단계부터 참가하는 편이, 보다 내가 원하는 게 느껴질 것이다. 거기다 너는 단팥죽에 대한 경의가 부족해. 그것이 네 단팥죽 맛을 단조롭게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이걸 기회로 너도 단팥죽과 똑바로 마주 봐라."
"아니, 단팥죽과 마주 본다니 무슨 소리야? 그랬다간 당뇨에 걸릴 거라고! 난 신쨩 같은 특수 체질이 아니니까, 이런 설탕 덩어리만 마시면 피가 달콤해질 거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너는 뚱뚱하지도 않고, 당뇨 가족력도 없잖아. 리스크는 낮은 것이야. …뭐 만약의 경우가 되면 내가 처방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거기서 상냥해져도! 수줍어해도! 안 설레거든!"
"시끄러워. 됐으니까 마셔라."
이 폭군 자식. 하지만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듣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그릇 중 그나마 내용물이 적어 보이는 쪽을 들어 올렸다. 안에는 검고 달콤한 액체. 냄새까지 달콤하다.
"으헥…."
"흠."
평소 단팥죽을 만들 때도 맛은 보기 때문에, 전혀 못 마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너무나도 달콤하다.
"조금 묽군."
"아―…그런 것 같기도 하네."
"거기에 팥에 패기가 없다."
"패기! 푸핫! 팥의 패기는 뭐야!"
"식감이 조금 부족한 것이야."
"음―, 뭐,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미도리마는 호로록 단번에 그릇 속 내용물을 다 마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서 제로칼로리 콜라를 꺼내 컵에 따라, 단팥죽과 번갈아가며 다 마셨다.
내가 가까스로 단팥죽을 다 마시자, 미도리마는 드물게 그릇을 들고 일어서서 싱크대까지 들고 가 헹구더니, 곧바로 다시 돌아왔다.
"좋아, 다음이다."
"기다려."
"뭐지?"
"설마, 이걸, 오늘 전부 비울 생각이야?"
"그럴 예정이다."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제정신이야?"
"완전히 제정신인 것이야. 설마 벌써 포기한 건 아니겠지? 내 단팥죽 탐구의 길은 이제 막 시작됐어."
소년 만화 완결편이냐?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남의 말 따윈 안 듣는 미도리마는 두 번째 캔의 뚜껑을 열었다. 내 소변이 달콤해지면 이 녀석에게 먹여 주겠어. 음뇨플레이 와라.
결국 그 날 네 캔까지 마시고, 내가 본격적으로 기브업을 외치고서야 끝이 났다.
다음날은 속이 쓰렸다. 고기를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단팥죽은 바로 효과가 있는 나의 위는, 본래 미도리마의 위와 궁합이 좋지 않다. 일에 지장이 생기면 곤란하니까 용서해 달라고 울며 애원한 결과, 일단은 성실한 사회인이기도 한 미도리마 선생님은, 단팥죽 탐구는 주말에 한 잔 만이라는 나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평일엔, 내 단팥죽에 질렸다고 선언한 뒤 그리운 캔 단팥죽(이러쿵저러쿵 트집을 잡아 결국 이상적인 단팥죽은 발견되지 않았다)을 로테이션으로 마시고 있다. 금요일의 캔 쓰레기가 늘었다.
레토르트 팩, 프리즈 드라이, 인터넷에서 산 유명 가게의 카이츄시루코(懷中しるこ)등, 인스턴트 종류는 전부 시도한 후, 우리는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우선은 미카즈키도(三日月堂)의 단팥죽부터다."
"거기 주차장 좁았지~."
이제 가을도 깊어져 세상은 행락 시즌으로, 나도 실은 사흘 연휴를 써서 온천이나 오키나와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우선 전통 다과점이란 사실에 이제 웃음만 나온다. 올봄에 산 붉은 페어레이디 Z를 한가로이 몰아,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평판이 좋은 전통 다과점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단팥죽 바보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한 얼굴이면서도, 조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이 녀석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참 어쩔 수 없다.
"기분 좋네. 신쨩."
"보통이다."
"돌아올 땐 영화라도 보고 밥 먹고 돌아가자. 나 그거 보고 싶어. 미국 히어로들 나오는 코믹 영화."
"오늘은 붐비겠지?"
"표 먼저 예약하면 괜찮아. 주위가 다 꼬마들 뿐일지도 모르지만."
"너도 시끄러운 게 꼬마랑 똑같아."
"오 그래―? 그럼 꼬마는 갈 수 없는 곳으로 갈까?"
"영화로 좋다. 가게에 도착하면 예약해 둬라."
"네네."
가정적이고 서민적인 구조인 미카즈키도의 작은 입구를, 모델 같은 얼굴과 몸을 가진 신쨩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자, 가게 안의 손님과 점원의 시선이 소리라도 날 법한 기세로 모여들었다. 무심코 마음속으로 끄덕였다. 그치그치, 이 녀석 멋있지? 내용물은 좀 그렇지만. 참고로 내 남자지만.
미도리마와 비교하면 인형같이 작은, 아르바이트생으로 보이는 여자 점원에게 안내받아 안쪽 자리에 도착했다. 뺨이 붉다. 미안해, 학생. 이 멋진 아저씨는 내 남자니까. 미도리마는 물론 눈치채지 못한 채 바로 메뉴판을 넘기고 있다.
"밤 단팥죽과 경단 단팥죽이 있군. 나는 경단으로 할 테니 타카오, 너는 밤으로 해라."
"어라, 같은 걸 안 먹어도 돼?"
"베이스인 팥의 맛은 같다. 게다가 토핑은 나눠 먹으면 돼."
"푸핫, 굉장한데. 디저트 가게에서 반씩 나눠먹는 여고생 같잖아! 아니면 아줌마들."
"네가 두 그릇 먹을 수 있으면 양쪽 다 시켜도 괜찮은 것이야."
"죄송합니다. 반으로 나눠주세요."
미도리마는 내 쪽을 흘깃 노려본 후, 점원을 불러 경단 단팥죽과 밤 단팥죽을 주문했다. 멋진 목소리. 터틀넥에 재킷을 걸친 미도리마는, 나가기 전에 내가 가볍게 머리를 만져준 덕에 빛이 날듯 멋진 남자다. 그런데도 이런 서민적인 전통 다과점에서 신나 있고, 본인은 그걸 전혀 모른다는 점에 웃음이 나온다.
목조에 삼베 방석을 얹은 아기자기한 의자는 미도리마의 몸에는 척 봐도 작았고, 색이 바랜 목제 테이블도 나와 미도리마 사이에 끼워져 가히 작다. 테이블 아래에서는 둘 곳 없는 미도리마의 긴 다리가 내 발밑까지 뻗어 있어, 무심코 발로 툭툭 건드렸다가 걷어차였다. 버릇이 안 좋다. 나도 미도리마 선생님도.
"바람 시원하네."
"그렇군."
"낮잠 자고 싶어~."
"영화는 어떻게 됐지?"
"영화 보고 밥 먹고 돌아가서 낮잠 자자."
바람이 활짝 열린 미닫이문과 가게 안쪽 창을 빠져나간다. 좋은 계절이다. 그 계절을, 어째서 나는 단팥죽의 바다에 빠져 보내고 있는 것일까. 끝없는 수수께끼다.
잠시 후, 조금 전 고등학생 즈음의 아르바이트생이 쟁반에 단팥죽을 가져왔다. 내가 밤이고 미도리마가 경단. 바로 입에 넣는다. 온 김에 녹차를 더 부탁한다.
과연 가게에서 파는 것답게, 지금까지 먹은 것보다 더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더라, 팥의 패기? 같은 것을 느낀다. 달콤함 뿐만이 아니라, 맛에 깊이가 있다.
"뭐, 맛있지 않아?"
"그렇군."
하지만 이걸 만들라고 해도 곤란하다. 아마추어가 심심풀이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뭐, 그때는 가끔 가게에 데리고 와서 먹이면 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도리마의 손이 멈췄다.
"하지만, 뭔가 아니다."
"응?"
"분명 맛있지만…뭔가 아니야."
"그래?"
"그래. 거기다 이건 젠자이고, 시루코와는 역시 다른 것이다."
"똑같이 쓸 때도 있지만…이건 수분기가 없잖아?"
"아―확실히. 조금 퍽퍽하네."
"이건 이것대로 깊은 맛이지만 뭐랄까, 역시 조금 아니다."
"하지만 맛있잖아."
"하지만 아니다."
미도리마는 발끈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큰일이다, 이건. 솔직히 나로서는 이 즈음에서 미도리마를 만족시켜, 이 주말의 단팥죽 스파이럴에서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명백하게 지금까지보다 퀄리티 높은 단팥죽을 앞에 두고, 미도리마는 이제까지처럼 묽다, 알갱이가 없다, 인공 감미료가 싫증이 난다는, 그런 구체적인 불평은 하지 않았지만, 아직 막연한 불만이 남은 듯하다. 단팥죽, 얕볼 수 없다.
우선 내 단팥죽에 파묻혀있던 있었던 예쁜 갈색 밤을 미도리마의 단팥죽에 넣어준 후 전부 먹어치우고, 그 날은 영화를 보러 갔다. 꼬마는 별로 없었지만 커플이 썩을만큼 많아, 앞자리의 교복을 입은 커플이 계속 장난치고 있는 걸 보고, 어른으로서 고등학생에게 져서는 안 된다 싶어 미도리마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더니 꽤 진심으로 손등을 꼬집혔다.
그리고 미도리마와 나의 단팥죽 탐구 여행은 점점 본격적이 되어 갔다. 인터넷에서 근처 전통 다과점을 조사한 후, 괜찮아 보이는 곳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돌았다. 단 걸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째서인지 회사 여직원들과 높은 레벨의 디저트 토크를 나눌 수 있는 나에게, 남자들의 시선이 따갑다.
"넌 가만히 있어도 꽤 인기 있는 주제에, 왜 그런 잔재주까지 쓰는 거야? 마리 쨩이 '타카오씨랑은 지금까지 별로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얼마 전에 아키랑 갔던 전통 디저트 가게 이야기를 하니까 잘 아는 거야. 게다가 굉장히 해박한 거 있지? 왠지 재밌었어~'이렇게 말했다고. 뭐야 정말. 너 술자리에서 디저트 나와도 먹은 적 없었지? 항상 남기지? 뭐야? 마리 쨩의 취미가 케이크 가게 투어란 걸 알고서 그런 거야? 너 마리짱을 노리고 있는 거냐?"
"나는 순수하게 시루코 목적이야."
"시루코는 누구야!"
알 바 아냐. 시루코 일단 죽인다.
처음엔 집 근처였던 전통 다과점 순회는 곧 시내 전역이 되어, 마침내 시외로까지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다른 용무로 멀리 나가도 우선 그 지역의 유명한 가게에는 반드시 들렀다. 단 걸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도, 오, 이건 꽤 싶은 곳도 있었지만, 미도리마는 변함없이 막연한 불만을 토로했다. 달지도, 짜지도, 묽지도, 진하지도 않고, 뭔가 아니다.
어쩌면 좋을까. 내 소변이 본격적으로 달콤해지면 어떡할 거야? 그때는 반드시 먹이고 만다. 울어도 먹이고 만다.
그러는 사이, 겨울이 되었다.
거실에 코타츠를 꺼내고 귤껍질을 벗기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여행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온천 여관과 경치가 훌륭한 노천탕이 흘러나온다. 연말은 이런 곳에 가는 것도 괜찮겠어. 하지만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것도 좋아. 그렇지만 역시 온천도 좋구나. 그런 걸 생각하면서 미도리마에 귤을 반 나누어 건네주자, 미도리마가 깜짝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응, 왜 그래?"
"그거다."
"뭐?"
"교토에 간다."
라라리라라리라리, 하는 멜로디가 머릿속에서 흘러나온다. 꽤나 오랜만의 전파 수신이다.
"뭐? 교토?"
"그래. 왜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
가능하면 영원히 잊어 주셨으면 하는 예감이 든다.
"화과자 하면 교토다! 그렇지 타카오!"
"…그럴지도 신쨩!"
그렇게 외치는 신쨩이 너무나도 기뻐 보여서 무심코 동의해 버린 것에 대해서는, 혼자 머릿속에서 회의를 열 만큼은 반성하고 있다.
다음날 즉시 둘이서 신칸센을 탔다. 역 앞 매표소에서 티켓을 산 후, 자유석에 올라탔다. 의욕이 넘쳐버린 미도리마 덕분에 무려 아직 아침 8시다. 평일보다 일찍 일어나, 밥과 된장국만 먹고 출근이다.
"역시 졸려, 신쨩…."
"도착할 때까지 자라. 깨워줄 테니."
"아, 하지만 신칸센 안에서 조사하려고 했거든. 교토 쪽 가게는 잘 모르니까…."
"괜찮다. 아카시에게 물었더니 추천하는 가게 리스트를 메일로 보내 줬어. 교통편도 적혀 있고, 예약도 해 준 것 같으니까, 남은 건 우리가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야."
"이 판국에 태연하게 다른 남자에게 의지하는 신쨩의 그 프리덤, 나 싫지 않아…."
아카시의 소변이 달콤해지라고 저주하며 잠들었다.
나고야에서 깜빡 잠이 깨어, 옆을 확인하니 미도리마도 자고 있었다. 주위에 손님도 없어 살짝 키스를 한 후 휴대폰의 타이머를 맞추고 다시 잠들었다. 일어나니 교토였다.
아 교토, 왜 교토일까. 죽을 만큼 추운 건, 아카시가 저주를 받아쳐서일까?
역 부근에서 우선 한 곳. 매운 걸 좋아하는 내가 맛있다고 말하고, 단 걸 좋아하는 미도리마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불합리. 그리고 키요미즈데라(清水寺)까지 가서 또 한 곳. 온 김에 관광. 여기서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미도리마. 그야말로 아카시가 추천할 법한 품위 있는 가게에 품위 있는 단팥죽으로, 뭐 반대로 여기서 만족해도 역시 매주 오자는 말은 할 수 없으니 상관은 없다. 그 후 버스로 아라시야마(嵐山)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낮이 되어도 춥네. 신쨩."
"추운 것이야."
미도리마는 코끝까지 머플러를 칭칭 감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잘생긴 얼굴도 의미가 없다. 새어 나오는 숨결이 하얗다.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나란히 도게츠교(渡月橋)를 건넜다. 카츠라가와(桂川)의 수면이 차갑게 빛난다. 마른 풀과 물 냄새가 나는 바람이 불자, 귀가 찢어질 듯 아파, 나도 머플러 속에 얼굴을 묻었다. 바람이 쌩쌩 분다.
다음은 어디에 가게 되는 걸까. 카나자와? 적어도 좀 따뜻하면 좋을 텐데, 신쨩. 그보다, 네 입맛은 너무 제멋대로야. 일본 전체를 돌아도 만족할 수 없는 게 아닐까? 그렇게 되면 해외로? 하지만 해외에 단팥죽 같은 건 없는 거야. 그리고 깨달았는데, 너와 나는 앞으로 주말을 얼마나 이렇게 보내는 거야?
딱히 싫은 건 아니다. 재밌다면 재밌으니까. 그렇지만, 뭔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강을 보고 있으니 쓸쓸해졌다. 나는 시험 삼아, 지금까지 사귄 여자들의 이름과 얼굴을 차례로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다들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고 성격도 좋았다. 여러 명 있었지만, 모두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항상 여자 취향만큼은 좋다고 들었었다. 누구도 미도리마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미도리마보다 상냥하고, 평범하게 사랑스러웠다.
왜 나는 이 녀석일까. 이 단팥죽 바보일까, 정말.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나를 두고 빠르게 다리를 건너는 미도리마의 등을 바라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가게에 들어가자 옆에 있는 난로 덕에 몸이 저릴 만큼 따뜻했다. 나온 단팥죽은 물론 달았지만, 일단 따뜻했으니까 맛있게 느껴졌다. 코를 훌쩍거린다. 콧물이 나와 티슈로 닦는다. 앞에 앉은 미도리마를 보니, 미도리마의 코 끝도 붉어져 있었다.
"티슈 쓸래?"
"그래."
"응."
미도리마가 코를 푼다. 그릇 속 단팥죽은 벌써 없어져 있었다.
"어때, 여기. 맛있었어?"
"맛있었다."
"만족했어?"
"…뭔가, 아니다."
"그런가―."
그리고 야츠하시(八つ橋)와 시치미(七味)를 산 후, 다시 역 앞 매표소에서 티켓을 사서 신칸센을 타고 집에 돌아갔다. 집에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그 다음 주말, 미도리마는 어디에 가자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드디어 계책이 바닥난 건지 생각하며, 우선 한가한 휴일을 만끽하며 빈둥거리고 있을 때, 미도리마가 내가 있는 소파로 와서는 나의 바지 자락을 당겼다.
"왜 그래? 어디 갈까?"
"나가지 않는 것이야."
"응―?"
"타카오, 네 단팥죽을 만들어라."
"뭐?"
부엌 선반 안쪽에서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팥 통조림을 꺼냈다. 내 술안주인 고등어와 꽁치 캔 안쪽으로부터 꺼냈다. 뚜껑을 열고 냄비에 부은 뒤 물을 넣고 보글보글 끓인다. 그 사이 미도리마는, 딱히 뭘 하지도 않으면서 부엌에서 내 뒤를 서성이고 있다.
"신쨩, 앉아도 돼."
"시끄러워."
뭐 이렇다. 하지만 좋다. 방 안은 교토보다 훨씬 따뜻하니까, 뭐든 좋다. 떡도 굽는다. 떡 표면이 쩍 갈라진다. 단팥죽은 적당히 맛을 보면서 소금과 물을 넣고, 불을 끈다. 그리고,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주홍색 그릇에 따른다. 떡도 넣는다. 신쨩은 완성을 지켜보며, 주방 테이블 앞에 도착했다. 나는 그릇을 신쨩 앞에 놓는다.
"자."
"잘 먹겠습니다."
"그래, 먹어."
예의 바른 미도리마는 제대로 손을 모아 인사한다. 아직 김이 올라오는 단팥죽을 앞에 두고, 잠시 후후 불어 식히며 기다렸지만, 곧 그릇을 들고 입을 댔다.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이 조금 느슨해진다.
"…역시 이게 맛있군."
그렇지,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말했잖아.
곧바로 떠오르는 불평을 열 개 쯤 가슴속으로 삼키고, 우선 내가 만든 단팥죽이 맛있다는 미도리마는 역시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턱을 잡고 키스했다. 달콤하다. 내 입에도 익숙해진, 내가 미도리마를 위해 만든 단팥죽 맛이 났다.
"어때, 맛있지?"
"그래, 맛있군."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그렇게 대답한다.
정말, 밉살스러울 만큼 사랑스럽다. 미도리마와 살기 전, 만났던 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차례로 떠올린다.
모두 사랑스러웠다. 세상에는 사랑스럽고 상냥한 사람이 많이 있다. 그 중에는 나를 좋아해 준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미도리마만큼 재미있지 않고, 미도리마만큼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지는 않았다.
사람은 오랜 세월 만나게 되면, 조금 질리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 만났다면, 조금 질려도 이제 와서 헤어질 수 없다.
밖에 나와 이것저것 찾아봐도, 결국은 만족하지 못한 채 집에 돌아와, 그 안에서 만족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조금씩은 치르치르와 미치르다. 그리고 나의 파랑새는 왜일까 초록빛을 띠고 있어, 잘 울지 않는 주제에 가끔씩 짹짹 시끄럽다. 그렇지만 뭐, 오늘 밤은 두고 봐. 울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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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정오가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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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기도 끝나고 빨래도 널었고 이제 느긋하게 보낼 일만 남아,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냈다. 본격적인 여름의 방문을 예고하는 것처럼, 오늘은 몹시 덥다. 반소매 셔츠 등에는 볕 아래를 조금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맺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도 어딘지 모르게 미지근하다.
냉장고 문을 닫았을 때, 갑자기 싱크대 위의 작은 창 너머로 사람 그림자가 지나간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음?"
기분 탓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야 없을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맨션은 삼층 건물로, 내 집은 제일 꼭대기인 삼 층 끝, 계단 반대편에 있다. 그래서 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은 내 손님뿐이다.
오늘은 아무 약속도 없었다. 택배가 올 예정도 없다. 온다고 하면 신문이나 보험 권유 따위의 쓸데없는 것 뿐이다.
어중간하게 열어뒀던 냉장고 문을 닫고, 싱크대에 기대어 맥주 풀탑을 열었다. 시원한 소리가 났다. 입을 대고 홀짝거리자, 차갑고 씁쓸한 탄산이 입 안을 자극했다.
"아아, 한가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휘청휘청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티비는 켜지 않는다. 토요일 오후의 티비는 전부 시시하다. 맥주캔을 테이블에 놓고, 기지개를 켠 후 천장을 바라보며 하품을 했다.
오늘은 갑자기 생긴 휴일이었다. 바로 직전까지 출장 예정이 있었지만,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친 결과 어제 갑자기 취소된 것이다. 시간이 생긴 것 자체는 고맙다. 매우 고맙다. 요즘 일이 너무 많아 주말에 제대로 쉴 수 없던 탓에, 집 안이 심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오늘은 몇 주 동안의 게으름을 만회할 수 있도록, 아침부터 계속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아~, 한가해…."
하지만 집안일은 해치우는데 반나절도 걸리지 않는 것이다. 쓰레기를 모으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말리면 그걸로 끝이니까.
맥주를 홀짝거리며 낮잠이라도 잘까 생각한다.
아니면 DVD를 빌리러 갈까. 하지만 혼자서 보고 싶을 만큼 재미있는 영화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두 명이라면, 또 다르겠지만.
"젠장, 미도리마 자식……."
엉뚱한 화풀이였지만, 무심코 입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
오늘 쉬는 게 결정되고, 나는 제일 먼저 미도리마에게 연락을 했다. 가능하다면 약속을 잡으려고. 요즘 미도리마는 일만 없으면 꽤 한가하다. 사귀고 있는 연인이 없으면, 주말에 나갈법한 취미도 없다. 이따금 키세키 일행에게 길거리 농구에 끌려갈 때는 있지만, 그럴 때는 내가 함께 가도 지장은 없기에, 일만 없다면 미도리마의 주말은 나의 점유물 같은 것이었다.
이번 주말, 미도리마의 예정에 일은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무려 그 녀석은 골프를 치러 간다는 것이다. 골프를.
안 어울린다. 직장 생활의 연장인 것 같지만, 정말 안 어울린다. 그런 것 때문에 나와의 주말을 헛되이 하다니,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라고 묻고 싶어 진다.뭐 물어보지 않아도 바로 일이라는 대답이 나올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러지 않는 거지만.
"아아……."
모처럼 얻은 오래간만의 휴일이다. 잘하면 하루 종일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홀로 외로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창 너머에서 떠드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것 같다. 정신이 들자 맥주 캔이 결로로 흠뻑 젖어, 테이블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런, 미지근해졌어."
캔에 남아있던 맥주를 단숨에 다 들이켰다. 탄산이 약간 빠지고 미지근해진 맥주는 묘하게 씁쓸했다. 빈 캔을 버리려고 싱크대로 향했다. 수돗물로 빈 깡통을 씻고 비닐봉지에 버리다가, 문득 또 싱크대 위의 작은 창에 정신을 빼앗겼다.
"응?"
커다란 그림자가 가로질러갔다. 나는 멍하게 입을 벌렸다. 곧바로 인터폰이 울렸다. 이번엔 기분 탓이 아니다.
"네!"
황급히 젖은 손을 바지에 닦고, 시멘트 바닥에 흩어진 구두를 짓밟고서 현관문을 열었다. 미도리마가 서 있었다.
"신쨩!"
"타카오."
미도리마는 왠지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현관문을 연 나를 보았다. 놀란 것은 이쪽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오늘 골프 치러 간 거 아니었어?"
"벌써 끝났다."
"빠른데?"
"다른 선생님들은 지금부터 회식이지만, 내가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으니까."
"아니아니, 접대 아니야? 오히려 거기부터가 실전 아니야?"
"몰라. 그보다 언제까지 현관에 서서 얘기할 생각이지. 들여보내라."
"아―네네, 어서 오세요."
"실례합니다."
"너는 왜 인사만 그렇게 예의 바른 거야? 정말 웃긴다니까."
미도리마는 구두를 가지런히 벗고 집에 들어왔다. 열린 현관에서 여름을 예고하는 미지근한 바람이 흘러들어와, 미도리마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땀과 제한제가 섞인 냄새가 났다. 나는 헤헤 웃었다.
"뭐지, 기분 나쁘게 웃지 마."
"있지, 나 조금 전에 네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내가?"
"그래. 약속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네가 일정이 있는 걸 알았는데도 왠지 네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런데 정말 네가 온 거야. 뭘까 이건? 영감일까?"
내가 히죽히죽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미도리마는 조금 고개를 갸웃하며 잠시 생각한 후,
"그건, 이심전심이 맞는 게 아닌가?"
라고 말했다.
나는 마음껏 웃음을 터트리며, 팔을 뻗어 살짝 땀에 젖은 미도리마의 등을 껴안았다. 우리의 이심전심은, 여기저기 어긋나고 엇갈리면서도 굳게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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